정치
[서중권 기자의 이슈진단] 이춘희 세종號, 갈등 초래하는 ‘기자실’ 팻말을 떼라(下)
기사입력: 2015/06/25 [16:13]  최종편집: ⓒ 충청세종일보
충청세종일보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회상하건대 우리 언론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를 꼽으라면 필자는 당연히 신군부와 IMF(국제통화기금)시대를 손꼽는다.

제5공화국시절 신군부는 언론기관을 통폐합시켰다. 지방언론은 1도(道), 1사(社) 원칙으로 적용해 특정사 하나만 남기고 모두 폐간조치했다.  이른바 ‘허문도법’을 단행했다.

사이비기자의 정화란 명분으로 정통성 없는 5공은 기자들의 ‘살생부’를 작성, ‘삼청교육대’로 끌어가는 등 언론인을 나락(奈落)으로 몰아 넣었다.

1997년 IMF는 대한민국의 위기였다. 언론도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 중앙지의 경우 각 도에 1명씩 두었던 주재기자들을 철수시켰다. 대부분 사표를 냈다.

필자가 몸담고 있던 중앙언론사도 구조조정을 단행해 자진 사표를 냈다. IMF의 칼바람은 필자의 운명역시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는 계기가 됐다.

당시 필자의 연봉은 4000여 만 원을 웃돌았다. 직원들은 대학생 자녀 2명까지 등록금 지원을 받는 복지혜택을 받았다.

기자실과 기자단 위세는 도(道)의 간부급 대접을 받았다. 시장, 군수 인사발령은 임명제여서 기자실은 ‘눈도장’을 찍으려는 간부들로 북적였다.

공보관실의 간부급 내정과 진급 등 인사는 출입기자단과의 협의로 이뤄진 사례가 많았다.

기자실을 방문하는 인사들 대부분 ‘촌지’는  묵시적 관행이었다. 봉투와 때마다 챙겨주는 선물은 그저 당연한 의례로 여겼다.

돌이켜 보면 특혜를 누리는 갑(甲) 위치에서 독점과 배타적 공간으로 돼버린 ‘기자실’은 그 폐해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시절 ‘기자실’은 역기능이나 폐해를 그다지 사회적 문제로 삼지 않았다.

언론인들의 수난기에 필자는 50대 초반의 나이로 잠시 방황하다 고향 세종시(당시 연기군)로 돌아왔다.

친정인 D일보에 복직하고, 지사운영까지 겸한 필자의 수입은 매달 적자였다. 수백만 원 까지 적자폭이 커지자 ‘광고수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늘 버거웠다.

출입기자들이 늘어나면서 기존 3사(사) 등 10여 명의 토박이 기자들이 뜻을 모아 ‘기자단’을 발족한 것이 세종시 기자단의 첫 출발이다. 아마 15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사실 지방지 주재기자들의 급여는 지대와 사무실 운영비 등을 제외 하면 매달 적자에 허덕이는게 현실이다. 그나마 급여가 없는 언론사도 부지기수다.

대부분 출입처에서 받는 광고와 일반광고 수주등 기자의 본업보다는 지사운영에 대한 부담과 비중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매체의 증가로 세종시 출입기자도 2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소속사도 바뀌는 등 ‘기자단’의 폐해가 사회적인 문제에 심심치 않게 올랐다.

이 과정에서 수년전, 기자단 소속 기자들이 언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며 자정운동을 다짐했다. 당시 ‘기자단’을 새롭게 태어나자는 이미지로 ‘기자협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기자협회’는 다시 ‘기자단’으로 쪼개져 2개 언론단체로 구성돼 현재에 이르렀다.

참여정부의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과 군소매체, 인터넷의 활성화는 세종시의 언론기조가 크게 바뀌는 계기가 됐다.

300여개의 매체가 등록 됐고, 무려 40-50여명의 기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토박이 시절에서 무려 4-5배 더 늘어나면서 '기레기'로 치부되고 기자실은  바람 잘날이 없게 됐다.

시는 새청사로 이전하며 출입기자들의 편의와 취재활동을 위해 ‘브리핑’룸 외에 ‘기자실’을 설치했다. 기자실운영을 특정단체에 일임하겠다는 입장이다. 건전한 언론자유와 사이비기자의 근절을 명분으로 삼았다.

세상사 어느 구석이든 언론개혁의 빌미는 ‘사이비언론 정화’다. 묘한 공통점이다.

이제는 세상이 크게 변했고 음습하고 부패한 문화를 척결하기 위해  ‘김영란법’이  제정됐다. 이 시점에서 암울하고  혼동의 시대를 겪으면서 외길을 걸어온 필자는 자화상도 얼룩이 졌음을 고백한다.

그 시절 ‘폼’재고, 온갖 특혜를 누리며 길들여진 기득권을 내놓지 못한 오만함이 부끄럽기에 다시 자성한다.

‘기자실팻말을 떼라’ ‘상, 중, 하‘를 끝내고자 한다. 마지막 원고를 쓰는 이 순간에도 누렸던 특혜의 작은 일부를 놓지 못하는 알량한 속셈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자책을 숨길 수 없다.

최근 세종시 기자실의 사태와 관련한 과정을 지켜보고, 갑(甲)의 위치에 있을 때를 돌이켜 보며 자성의 시간을 갖는다.

차제에 '서중권 기자의 이슈진단'으로 상처를 받은 동료 후배들이 있었다면 정중히 양해를 구한다. 더불어 필자의 가슴 속 깊이 오만하게 자리 잡은 ‘기자실’ 팻말을 떼 낸다.

이 글을 애독해 주시고  격려해주신 독자들이 있기에 진정어린 속내를 담아 마음을 펼쳐 보았다.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충청세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 도배방지 이미지